아주 오래간만에 종이책으로 독서를 했다.
지난달 방문한 서울에서
독서모임 멤버님께 종이책 ‘모순’을 선물 받아 싱가포르로 들고왔다.
독서모임 멤버들과 오래간만에 똑같은 종이책으로 함께 읽고 책 대화도 나누었다.

스테디셀러 ‘모순’
한국 소설 중에 이 정도로 꾸준히 잘 팔리는, 사랑받는 소설도 드물 것 같다.
내가 가진 책을 보니 2판 277쇄다.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나 계속 인기가 있을 수 있을까.
나름대로 꼽아본 이유들은 아래와 같다.
- 전자책이 없다. 종이책으로 사거나 빌려 읽는 수밖에 없다.
- 문장이 정말 쉽다. 쉬워서 술술 읽힌다. ‘척’하는 문장이 아니라서 사랑스럽다.
- 플롯이 그리고 안진진의 선택이 전형적이지만 또 그게 매력이다.
다시 읽은 ‘모순’
사실 이 소설은 20대 초반에 읽었었다.
그때는 안진진의 선택이 너무 뻔한거 아니야, 도대체 이 책 왜 인기 많은거지 이해가 안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가볍게 넘겨 버렸었다.
그러다가 40세가 되어서, 결혼 생활도 11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 다시 읽게 됐다.
작가는 천천히 읽기를 바란다고 써두었지만
워낙에 술술 읽히기 때문에 결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다 알고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읽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읽으니 더 좋았다.
워낙에 출간된지 오래된 소설이니
그냥 결말까지 스포가 되는 감상을 다 적어보자면,
이모의 극단적 선택이
이모와 엄마 두 사람의 삶에 대해 ‘안다’라고 생각했던 안진진의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모의 삶을 몰랐구나,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김장우에서 나영규로의 변화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김장우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잘 보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사랑이고,
나영규의 활력에 감탄하며 의사 사랑이라고 했던 안진진이
결국 결혼 상대로는 나영규를 택하는 결론이 충분히 납득가능했다.
‘모래시계’나 ‘헤어진 다음날’ 같은 시대를 드러내는 소재들이 없었다면
최근에 쓰인 소설이라고 믿을 만큼
공감하기 쉽고 술술 읽히는 읽기에 좋은 소설이었다.
밑줄 그은 문장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28p
서툰 행동, 성급한 태도, 절박해보이는 모든 것들이 결국 그 사람의 아비투스를 드러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책 <아비투스>를 같이 읽고 있어서 더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75p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157p
말이란 것, 특히 솔직한 말이란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은 무례한 것데 그냥 본인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면서,
솔직함이 미덕이니 괜찮다고 그릇된 판단을 하고 또 당당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들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27p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네가 하는 박사 공부는 그렇게 단순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나도 아직 잘 모르지만.” 176p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296p
20대 중반인 안진진이
이렇게까지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깨달은게 많다니 하면서 감탄한 부분이 꽤 됐다.
그러다가 갑자기 작가가 이 소설을 몇살에 썼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쳐서
작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검색을 하게 됐다.
너무 뻔한 스토리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놀랍다. 그래서 이 소설이 계속 사랑받는 것 같다.
모처럼 페이지터너를 만나서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독서모임 멤버분이 <19호실로 가다>를 추천해주셔서
독서 모임이 끝난 오후에 곧바로 찾아 읽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밀리의 서재에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단편소설 집의 표제작이고 시작하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멈추지 못하고 다 읽어버렸다.
한국 작가는 아니지만, 여성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문장들과 쉬지 않고 읽도록 끌고 가는 힘이 좋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무런 정보 없이 딱 저 단편만 이북으로 읽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도리스 레싱’ 이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였다.
나머지 수록작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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