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참 곱고 완만하다 –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고

독서모임의 12월 책으로는 가볍게, 따뜻하게 마무리하자는 마음으로 에세이를 읽기로 했다.

백수린 작가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었다.
백수린 작가의 기존 작품들, 특히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평가가 좋아서 고른 에세이였다.
도서관에 예약을 해두었다가 인기도서를 기다리는 일에 지쳐, 이북으로 구매했다.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라서 짧은 호흡으로 끊어가면서 읽기에 좋았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읽다보면 다정하고 고운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글이 참 곱고 완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극적이고 통쾌하고, 강한 몰입을 이끌어낸다기 보다는
곱고 완만하게 뜻하는 바를 잘 전달하는 그런 책이었다.


첫부분을 읽으면서 ‘동네가 어디일까, 이화동일까 청파동일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고?’하는 생각을 했다.
‘젊은 여성’인 작가가 혼자서 주택살이를 결심하다니 작가의 용기와 결단에 감탄하면서 빠져들게 된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다는 행위가 관념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인 것들, 물질성이랄지 육체성을 가진 것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막연했던 것이 또렷해지는 순간, 정확하게 표현된 깨달음이 잘 와닿았다.
최근에 이제서야 겨우, 혼자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체험해본 상황인지라 더욱 이 부분이 눈에 뜨였던 것 같다.
물론 작가와는 아주 다른 환경에서,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의존해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산다는 것의 물질성, 육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깨닫고 있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작가의 모습이 참 섬세하고 예민한, 차분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부분이었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 을 잃지 않으려고, 그 감각을 끊임없이 키우려고 의식적으로 애써야 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가치에 매혹되지만 사실 순간을, 하루를 살게 하는 건 바로 그런 것들이라는 걸 참 잘 표현한 구절이다.

나에는 사람이나 동식물처럼 생명을 지닌 것이든 공간처럼 그러지 않은 것이든, 무언가가 품위와 존엄을 가질 수 있는 건 수많은 상실과 슬픔을 견디며 쌓아올린 세월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다. 시간을 견뎌 낸 것들은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람이나 공간, 또는 책이나 미술품 등을 보고 감탄하는 데에는 바로 이 ‘시간을 견녀 낸 가치’가 큰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종종 세상에 없던 새로운 어떤 것, 낡음에 대비되는 새것에 대한 열광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간을 견뎌낸 것들이야말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교환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라는 걸 생각해보게 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60대에 접어들어 쓴 노년에 관한 책⌜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2002에서, 일찍이 우리는 노인을 타자로 여기기 때문에 ‘노화’, 즉 ‘나 자신’이며 동시에 스스로가 ‘타자’가 되는 이 낯선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 듦이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가장 가치 있는 축복은 젊은 시절 우리의 눈을 가리는 허상과 숭배를 치워버리고 우리가 진정성에 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도 적었다.

연말이기도 하고, 2023년을 회고하며 허무주의에 빠질 때가 종종 있는데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던 와중에 이 구절을 만났다.

‘눈을 가리는 허상과 숭배’를 치워버리는 것,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젊음’에 대한 찬양에만 익숙해져있고, 쇠락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마음상태에서 한 걸음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책에 언급한 레베카 솔닛의 책을 다음달 모임의 책으로 정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백수린 작가의 다른 작품, 소설을 더 찾아 읽어봐야겠다.

읽게 되어 행복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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