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는 도시를 옮겨 새 학교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업무용 폰을 개통했다.
퇴근 시간 이후에도 새벽까지, 또는 주말에까지 담임교사로 사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쾌한 일을 밤에 겪고 나면 재충전을 당연히 하지 못한 채 출근해서 괜히 아침에 조회시간에 보는 아이들 얼굴까지 미워지는 것 같아서 마련한 방법이었다.
엄격하게 따지면 담임교사가 굳이 휴대폰 번호를 공개할 필요도 없다.
학교에는 자리마다 업무용 유선전화가 있고 비상연락망과 숙직기사님이 계시기에 정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전달은 된다.
하지만 실상은,
학부모님과 아이들 모두에게 모든 걸 유선 전화만으로 해결하기엔 힘들다.
조회와 수업, 종례를 모두 잘 해내려면 마냥 전화기 붙들고 기다릴 수 없어서,
문자메시지를 통한 소통이 오히려 더 원활할 때가 많고 아이들하고의 카카오톡도 파일 전송 등 기능이 수월하다.
학교는 카카오톡 메신저를 막아두지만
담임교사가 학급운영을 위해 필요하며 목적에 맞게 사용하겠다는 취지의 신청서를 내면 사용할 수 있어서 공지용 반톡도 잘 활용하고 있다.
퇴근후의 삶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업무용 폰을 2020년 연초에 개통하여 새로 만난 아이들과 학부모님들께는 모두 두번째 번호만 알려줬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일과 삶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나도 불안감도 들고 어색했지만 다음날 출근해서 8시 이후에 답을 드리니 이제 익숙해지신 것 같다.
보통 아침 출근길에 운전중일때, 오늘 아이가 어떠해서 학교 늦는다, 못간다 등의 연락을 참 많이 받았었는데
이제 출근 후에 자리에 가서야 가방에서 투폰을 꺼내니 운전 중에 그럴 일이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아이폰의 최대 단점인 통화중 녹음 불가도 투폰을 안드로이드폰으로 쓰니까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티자동녹음이었나? 그 기능이 있어서 통화가 자동으로 녹음되는 것도 좋았다.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애 수능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소리지르며 불만을 토로하신 학부모님의 고성도,
미인정결과처리에 불만을 품고 담임이 아이 앞길 막는거냐며 지워달라고 항의하시는 학부모님의 토로도… 다 녹음되어있다.
감정쓰레기통 역할도 담임업무의 하나인가 싶은 순간들이 있는데
그 감정들을 투폰에만 담아두고 더 이상 나를 갉아먹지 않게 거리를 두게 된 것 같다.
쓰다보니 불쾌한 일 방지, 불쾌한 기억의 증거물로만 투폰이 연결되는 것 같아서 씁쓸한 감정이 들지만
감사 인사나 좋은 일들도 (보통 좋은 일은, 감사인사는 문자로 차분하게 온다) 투폰에 남아있다.
결론은 나의 투폰 사용이 2020년 스트레스를 줄이는데 정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새해 첫날, 원폰의 번호를 알고 있는 이전 학교 제자들에게 연락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스승의날이나 12월 31일에는 종종 아이들로부터 힘이되는 문자를 받는다.

사실 새 도시에서 아이들하고 바로 고3으로 만나서,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얼굴 맞댄 시간도 적고 서로 거리두기에만 힘써서 마음이 많이 황폐해진 상태였다.
사실 9년 연속 담임을 하다보니 이제 제발 비담임 좀 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기대도 정도 주지말고 책임만 다하자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제자의 문자를 읽어보니 내가 저번 학교에서는 아이들하고 더 가깝게 지냈었구나, 더 내 마음을 공개하고 더 마음이 담긴 수업을 해서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톡을 준 이 아이는 2학년 담임으로 만나서, 3학년때는 담임은 아니었지만 꾸준하게 국어 수업 시간에 만났던 남학생인데 정말 감사하게도 이렇게 고운 마음을 표현해줬다.
모든 아이들이 이 제자처럼 내 수업에 만족하고 나를 좋은 교사로 기억할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애써만든 서평쓰기 대상 책 목록을 아직도 가지고 있고 좋은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해주어서 정말 코끝이 찡하게 느껴질 만큼 감동을 받았다.
제자가 이렇게 내게 응원과 격려를 해주는구나, 이게 또 내 직업이 주는 보람이구나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2020년 내가 가르친 아이들에게 이렇게 좋은 기억을 남길 만큼 내가 열심히 했는가, 다정하게 응원해주는 좋은 어른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엄격하지만 좋은 선생님이고 싶었는데, 엄격함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졸업일까지 아이들은 계속 온라인 수업이고
마지막 워킹스루로 졸업장과 앨범을 전해주면서 극히 짧은 순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겠지.
대학으로 또는 재수학원으로 떠나는 아이들을 잘 보내주고
또 열심히 나를 충전해서 새로운 아이들과 함께할 준비를 하며 겨울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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