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를 읽었다.

고등학생 때 선택한 문/이과를 기준으로 개인의 성향을 추측하고 나누는 일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닫고 배우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나는 단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뼛속까지’ 문과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2016년부터 계속해서 이과반 담임만 맡아서, 이과반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이과반 아이들의 대학 진학 지도를 하면서 문/이과 고정관념이 더 강해지고 차이만 두드러지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날 수록 늘어가는 ‘세대차이’를 내가 문/이과의 차이라서 그렇다며 위안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학생부종합전형의 시대에 ‘독서활동상황’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전처럼 책 내용과 감상까지 정리해서 적어주지 않고, 오로지 ‘책제목(저자)’로 기입해주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꽤나 심사숙고해서 전공에 대한 관심도를 보여줄 수 있는 책,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심화된 지식을 탐구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기록지를 제출한다.

일정한 양식의 기록지를 제출하거나, 독서교육시스템에 로그인해서 일정한 분량 이상의 독후기록을 남기면 생활기록부에 기록해주는 것이 교사의 몫이다.

정말 정말 많은 아이들이 당당하게 읽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고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드디어 나도 읽었다.

사실 혼자서는 도저히 완독을 못했을 것 같고, 11월과 12월에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하여 (너무 두껍고 힘든 책은 두달로 나누어 읽고 있다) 던지고 싶어도 꾸역꾸역 참으며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정말 니네가 이걸 읽었을까, 그래 너희들도 다 읽는 책이라면 어디 나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유행하는 청소년 소설이라면 이렇게까지 궁금하고, ‘어디한번’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너무나 유명한 책이지만, 책검색 결과

40주년 기념판으로 읽어서 앞부분에 서문만 다 읽는 데도 오래 걸린다.
앞부분에서는 무엇보다 1976년 35세의 작가에 의해 출판됐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긴 그래서 이 문제적인 ‘책 제목’을 선택하고 밀고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라는 의미로서의 단위이고, 개체는 ‘운반자’라는 의미로서의 단위다. 둘 모두 중요하다. 어느 쪽도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둘은 완전히 별개의 단위이며,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서문을 읽다가 지치는 느낌도 있지만 개념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훌륭한 조정 선수의 자질 중 하나는 팀워크, 즉 팀 내 다른 선수들과 협조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강한 근육만큼이나 중요하다. …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물리적으로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유전다들이 상호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음 세대의 몸속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대부분의 유전자, 즉 유전자 풀 내 다른 유전자 모두와 잘 협조하는 유전자는 유리한 셈이다.

협조. 팀워크. 이 능력이 참 중요한데 리더십만 강조하다보니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협조하기 보다는 그냥 혼자 다 해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대부분 뛰어난 한 명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넘는 범위, 더 큰 일을 맡기에는 한계가 생기는 리더다. 아무리 뛰어나도 협조를 이끌어낼 줄 모르는 리더는 프로젝트를 맡기기에 한계가 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또한, 어디에 갖다놔도 남들과 잘 어울리고 협조를 잘 하는 아이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치절하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둥글둥글하고 유순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줄 줄 아는 아이들이 참 귀한데 날이 갈수록 드물게 보인다.

괜히 시작했다… 라는 후회의 마음으로 어느 정도 참고 버텨야 좀 흥미진진해진다.
근연도를 따지면서 혈연 이타주의를 얘기하는 부분부터 흥미가 높아지다가 7장 가족계획 부분부터는 집중해서 읽을 수 있게 된다.

아이패드로 읽으며 에버노트에 메모하고 적는 재미에 푹 빠졌다. 종이책이었다면… 음 무거웠겠지.

특히 9장 암수의 전쟁에서는 인간 남녀를 넘어서 행동 근거를 이해하게 되는 면이 많다.
그 뒤부터 집중해서 쭉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몸속에 있는 모든 유전자가 ‘기생적’ 유전자다. 우리가 그것을 몸 ‘자신의’ 유전자라고 부르고 싶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 내부 기생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제 모든 사실을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이라는 표현을 써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확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는 동물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유전자에게 이익을 주는가 묻지 말고 그 행동이 이익을 주는 것은 누구의 유전자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불멸의 자기 복제자
세상에 있는 대상물은 여러 생물 개체 속에 들어앉은 여러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력의 그물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 세상 전체가, 멀거나 가까운 표현형에 미치는 유전자의 영향을 잇는 인과의 화살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 우주의 어느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요즘 코로나로 고통받으며 버티는 2020년을 보내면서,
지구와 인간의 관계, 인간과 코로나바이러스의 관계, 지구와 코로나바이러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읽게 됐다.

또한 2세를 남기지 않고 살다가 가는 삶이 유전자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실패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면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남겨야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계속 더해졌다.

그리고 ZOOM을 통해 계속하고 있는 독서모임의 힘도 또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 모임에서 과학전공자인 분의 이해와 설명이 많이 도움이 됐고,
서로 다른 상황과 전공에 따라 달라지는 비유와 이해, 삶의 장면을 나누면서 이해하는 책은 혼자읽는 책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으니까.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아니 석달이든, 넉달이든 끝까지 다 읽을 수나 있을까 걱정했던 책이었는데
어찌어찌 완독해내고 나니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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