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읽었다.

친구와 둘이하는 북클럽의 3월 책으로
보니 가머스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읽었다.

너무 바쁘면 1권만 읽고 얘기하자고 정해놓고선
둘다 너무 재미있어서 푹 빠져서 읽었다고, 2권이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고 즐겁게 대화하게 됐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 책검색 결과

역시 베스트셀러는 다 이유가 있구나,
애플티비에서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까지 뉴스로 접했었는데
왜 그때 안 읽고 이제서야 읽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작가인 보니 가머스는 예순 네살에 이 소설로 데뷔했다고 한다.

얼마전 읽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에서 작가 문미순의 ‘작가의 말’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고 박상륭 선생님이 어느 강연에서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하셨다던 말씀도 그중 하나다.
“너무 젊어서부터 소설에 모든 걸 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그 일에 전문가가 되고 그것에 관해 쓰면 그게 소설이 되는 거지, 소설이 뭐 별건가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어렵지.”

작가 박완서나 보니 가머스가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좋은 사람으로 열심히 살다가 쓰고 싶어지면, 마침내 잘 써내면 그때 작가가 되는 거다.

1960년대라니, 그렇게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참 노골적인 시대였구나, 우리가 그렇게 멀리까지 온 건 또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엘리자베스 조트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인 인물이라서 진심으로 응원하면서 읽게 된다.

그녀의 말에 캘빈은 순수한 태도로 물었다.
“대체 어떤 성차별이 있다는 말이에요? 과학계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다고요? 말이 안되잖아요. 과학자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따름인데.”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캘빈 에번스가 똑똑한 남자라고 생각해왔건만 다시 보니 그는 아주 좁은 분야에서만 똑똑했다. 67쪽

캘빈처럼 똑똑한 사람조차도, 그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구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캘빈은 자기계발 같은 걸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심지어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도 끝까지 읽지 않았다. 한 열장쯤 훑어보고 나자, 자신은 남의 생각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다. 그녀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게 바로 사랑의 정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위해서 정말로 내 모습을 바꾸고 싶은 마음. 173쪽

두 사람의 사랑에 관한 내용이 좀 더 펼쳐질 줄 알았는데…

(이후 전개될 내용은 결말까지 다 스포를 포함하게 된다)

캘빈은 정말 아무런 준비없이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갑작스러운 사별과 함께 알게 된 엘리자베스의 임신이 너무 뜻밖이어서
특히 후자는 그렇게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소설이 전개되는 거겠지 하면서 이해하고 넘어가게 됐다.

만약 해리엇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엘리자베스나 매드 둘 중 하나는, 아니 둘 모두 죽지 않았을까.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신생아와 단 둘이 어떻게 지내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에
정말 완벽한 조력자가 나타난 것도 재미있었다.
해리엇과 엘리자베스의 관계야말로 그야말로 ‘가족’이 아닌가.

“왜 우리 엄마가 이토록 인기가 많을까요?
“왜냐면 생각한 바를 정확히 말하기 때문이야.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거든.” …
“생각한 걸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왜 드문데요?”
“그러면 뒤따라오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야.” 149쪽

엘리자베스의 매력에 대해 아이에게 쉽게 설명해주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엘리자베스가 딸에게 건네는 말들 중에서도 주옥같은 말들이 많았고
아이답지 않은 성숙한 아이지만, 어쨌든 어린 아이인 매드가 등장함으로써
매드를 향해 건네는 주위 어른들의 말들이 참 쉬우면서도 생각할 것이 많아서
소설이 더 매력적이었다.

“저는 원자와 분자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로스 씨,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진짜 규칙 말이죠. 여자들이 이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면 그들을 위해 창조된 세상의 그릇된 한계를 보게 될 겁니다.”
“그들이라는 건 남자를 말하는 거로군요.”
“남성을 단성적single-sex 지도력을 갖춰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역할로 몰아넣는 인위적인 문화와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화학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만 있어도 이런 일방적인 접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210쪽

작가가 엘리자베스의 입을 빌려서,
더해서 생방송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마음껏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도
뻔하면서도 또 재미있었다.

그리고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인물의 모습이 얼마만큼 편파적일 수 있나,
유명해짐으로써 생기는 장단점을 확실하게 알 수도 있었다.

다만, 결론 부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결국 캘빈의 혈육, 생모가 나타나고 그 생모가 가진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연구소의 모든 적폐가 해결되다니.
매드의 가계도에서 요정 대모님이 현실로 나타나고, 그 사람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다는 것이
너무 동화적 결말이어서, 소설인걸 알고 읽으면서도 약간의 실망감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 스스로 얻은 성취만으로
충분히 결말을 낼 수 있었을텐데
연구소 사람들에게 그동안 ‘당한’ 것이 있으니 그들을 향한 통쾌함을 주려고 한걸까.
잘 나가던, 엄청나게 잘 되던 방송을 그만두고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엘리자베스가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하던 찰나에
갑작스러운 혈육 찾기의 감격과 자본의 힘으로 결말이 맺어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충분히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을 멋진 사람을 상상하면서 푹 빠져서 읽다가
갑자기 판타지로 끝나버린 그런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푹 빠져서, 주인공을 마음껏 응원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강추.

드라마는 8부작이던데 꽤 긴 이야기를 어떻게 축약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조만간 찾아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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