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었다.

셀레스트 응이라는 작가도 처음 들었고,
독서모임 멤버분께서 추천하셨는데 별다른 정보 없이 시작했다.

사실 다른 할일을 하지 않고 있는 내 죄책감을 외면하고자 생각없이 시작했다가
멈추지 못하고 밤을 새워서 읽었다.
백수 생활의 장점이자 단점은
내가 책이든 드라마든 뭔가에 푹 빠지면 내일의 계획 따위는 바로바로 변경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이패드로 밤 새워 보는 것보다는 이북리더기라 좀 나으니까… 하는 핑계를 대면서 이번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책은 큰 줄거리를 모르고 시작해야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아마 알았다면 끝까지 안 읽었을 것 같다.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도서정보 출처 : 교보문고

지금부터는 소설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도저히 결말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감상평을 쓸 수가 없다.

스포 주의

작가는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메릴린, 제임스, 네스, 리디아, 한나로 이루어진 이 가정의 구성원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다. 좀 답답해도 기다리면, 싹 알려주는 식이다.
일어난 일들을 단순하게 시간 순서대로 쭈욱 배열했다면 아마 너무 뻔하고 지루해졌을텐데
리디아의 죽음을 첫문장으로 시작하면서도
메릴린의 소녀시절, 제임스와의 첫만남,
제임스 부모의 삶에 대한 묘사 등 역순행적 구성을 잘 써서
독자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시대적인 배경이 현재보다는 많이 앞서 있어서
소수 인종으로, 아시안이 미국 사회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과 아픔들 때문에
그나마 제임스를 그리고 메릴린까지 이 부족한 부모들을
정말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다.

아무리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제임스가 벌이는 루이자와의 불륜 그리고 맏이 네스를 대하는 태도는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건 내가 결혼한 여성이자 장녀라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메릴린에 비하면 제임스는 그가 도대체 인생에서 뭘 포기했고 뭘 놓쳤는지 모르겠는데
왜 대학교수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로 가장이 된 지금까지도
자꾸만 차별받고 상처받은 가난한 동양인 아이로 퇴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지,
힘든 순간마다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는지
그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마다 화가 났다.
리디아의 장례식날 루이자의 집으로 가서 현실을 잊고 위안을 얻는다는 부분은 정말이지 역겨웠다.

메릴린은… 정신적으로 미쳐버리지 않은게 용하기는 했다.
“도대체 왜 피임을 안하지?! 제정신인거야!!!” 를 몇번이나 외치며 읽었다.
영특하고 야심을 가진 소녀로 실컷 그려놓고선
한순간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지능이 떨어져보이는 선택들을 하는것일까?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첫째 아이까지는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생명 소중하지 하면서 다 이해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애를 셋이나… 더는 심한 말 밖에는 나오지가 않는다.

아이 둘과 남편을 내버려두고
8년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자기 꿈을 추구해보겠다면서 나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후의 선택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밖엔 이해가 안 간다.

본인 조차도 의사라면 응당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대학교육까지 받은 메릴린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한 인격체로 존중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다는 것에
황당할 정도였다.

이후 리디아를 대하는 메릴린과 제임스의 태도는
1970년대 미국 시골의 중국인 혼혈아의 부모 메릴린이 아니라
그냥 내가 겪었던 사람들, 2020년대 대한민국의 부모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시대나 자식을 통해 본인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부모의
이기적 욕심과 넘치는 에너지는 비슷한 것인가보다.

본인의 좌절된 꿈, 혹은 본인만큼의 성취를
자녀에게 강요하는 그런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고 그들의 억지에 소모되어가는 내가 싫었던 과거의 느낌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숨막히기도 했다.

그래서 결말 부분에서
리디아의 마지막 선택을 몇번이나 다시 읽어보게 됐다.
괜찮을거라고 믿고 물위로 내딛는 그 한걸음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러번 읽어보게 된 구절이다.

읽는 내내 리디아는 자살일 거라고 생각했다,
잭과의 성적인 문제가 있든 없든 그런건 부차적인 것일 뿐이고
메릴린도, 제임스도, 네스도 더 괴로우라고 그래서 유서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내려갔는데 …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고 허무했다.

제임스를 다시 받아주고 품어주는 메릴린이나,
아직 어려서인지 부모에게 한결같은 애정을 표현하는 한나나,
물리적 거리를 획득함으로써 자기 삶을 위한 새출발을 꿈꾸는 네스나
그냥 리디아를 가슴에 묻고 잘 살아갈 것 같다.

지금까지 쭉 방치하듯이 한나를 키워놓고선
어쩌면 메릴린과 제임스가 넷째 아이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징그럽기도 했다. 이건 너무 나아간 생각이겠지.
어떤 의미로 둘은 천생연분이다.

영미 소설의 경우에 배경도 인물들의 가치관도 너무 차이가 느껴져서
한국 현대소설에 비해서 몰입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
예외적으로 푹 빠져서 읽었다.
결말 때문에 괜히 읽었다고 욕을 좀 하긴 했지만
충분히 재미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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