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오래 고민하던 일을 실행했다.
사진은 없지만 글로 남겨놓는 후기.

숏컷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올바른 표현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남자처럼’ 자르고 왔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내 곱슬머리가 싫어서
십대 시절부터 4-6개월에 한번씩 지속적으로 스트레이트 펌을 하면서
가짜 생머리를 연출하고 살아오다가
21년 가을부터 곱슬머리를 받아들이고 살기 시작해서,
점점 곱슬머리의 자연스러움이 좋아지고
펌이 필요 없는 아주 편리한 머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싱가포르는 날씨도 일단 일년 내내 덥고,
직장에 출근하지도 않는 나의 생활 특성 상 거의 100퍼센트 집게핀으로 올림 머리를 하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머리를 감고 말리는 것이 자꾸 불필요한 노동처럼 느껴졌다.
수영을 한번이라도 더 하고 싶다가도 머리 감고 말리다 보면 운동보다 힘들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분명히 샤워하고 나온건데 머리 말리다가 다시 땀이 나는 싱가포르 생활이다.
함께 사는 남편은 저렇게 편리한데 왜 나만? 무엇을 위해서? 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결단을 내렸다.

나름 챗 지피티로 나의 요구사항을 영어로 잘 적어서 헤어샵에 갔더니
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헤어드레서는 영어를 잘 못했다.
대신 전 직장이 한국인 미용실이어서 동료들이 전부 한국사람이었다며 웃었다.

원하는 스타일의 멋진 여성분들 사진도 보여주고, 아주 초보적인 영어로 소통했다.
상대방이 영어 원어민인 편이 사실 소통이 더 편안한데,
둘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다보니 좀 웃겼다.
귀 옆을 자를 때 내가 너무 긴장하니까 농담도 해주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평일 오후에 갔더니 손님이 별로 없어서 나한테만 1시간을 넘게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자꾸만 너 진짜 후회 안할 거냐고 물어보고
조금 자르고 이제 됐냐고 물어봐서
난 계속 더 짧게 잘라달라고 한 100번쯤 말한것 같다.
뒷머리는 계속 더더더를 얘기했더니 이제부턴 이거라면서 한손에 바리깡(?)을 들어 보여주길래 멈췄다.
뒷머리를 바리깡으로 정리하면 정말 남편이랑 스타일이 똑같아 질거 같아서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싱가포르의 다른 헤어샵은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간 곳은
남자든 여자든 커트 비용이 같았고,
자르고 샴푸하고 (안마의자라서 좋았다) 또 엄청 심혈을 기울여서 잘라주어서 만족스러웠다.
32싱가포르 달러가 아깝지 않았다.

아 자르고 나서 거울을 보니
안어울리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은 참 쓸데없는 것이었다.
자르고 나니 정말 장점밖엔 없다.

피부톤과 안 맞는 색으로 과감하게 염색을 한다면 모를까,
이 커트는 뭐 안 어울릴 게 없는 그런 스타일인것 같다.
그냥 내 얼굴, 내 본연의 모습이 잘 들여다보인다.
나는 앞머리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고
길이가 짧아서 손으로 쓱쓱 넘기면 충분해서 빗을 것도 없다.

결국
얼굴이 더 잘생겨보인다. (내 착각이겠지만, 이게 나구나!)
샴푸말고 머 필요한 것도 없고 샴푸도 진짜 조금만 필요하다.
사용하던 트리트먼트 제품이 좀 남았는데 쓸일이 없을 것 같다. 두피를 피해서 바를 수 없으니까.
머리감는 시간이나 자세가 진짜 편했다.
감는 것도 말리는 것도 고개를 숙여서 힘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
남자들은 일평생 이렇게 사는 거였군!

그리고 정말 목이 가벼운게 느껴진다.
그 전에 긴 머리도 아니었고 호치민에서 또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겨우겨우 어깨 정도 오는 머리였는데도
자르고 나니 확실히 무게감이 다르다.
뒤통수를 만지면 먼가 허전한 느낌이 들고…

39년여를 봐온 내가 너무 새롭다.
살면서 그 어느때보다 거울을 많이 본 날이었다.

헤어샵에서 만져준 것처럼
컬크림이나 무스로 스타일링을 좀 해줘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냥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말려봤는데 워낙에 길이가 짧고 컬이 있어서 꽤 괜찮아 보인다.
싱가포르에서는 정말 신경쓸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도가 더더욱 높아진다.
한국에 가서 출퇴근하고 그러면 쏟아지는 외모 평가(긍정이든 부정이든)를 신경쓸 수 밖에 없겠지만.

매우매우 만족스럽다.
유일한 후회는 진작에 하지 않은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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