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발견 – 앞서 나간 자들’.
제목부터 거창하고 양도 방대하다.
혼자서라면 시도해보지 않았을 책이었는데 독서모임에서 추천해주셔서 읽게 됐다.

비문학(독서) 지문에서 자주 접해본 케플러나 레이첼 카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음 접해본 인물들이었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이들이 해낸 성취, 가졌던 확신과 노력들에 비해서 그동안 너무 묻혀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게 됐다.
이토록 많은 지식인들을 ‘발굴’ 해내고 ‘연결’ 해내다니 작가의 해박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발굴이야 각각의 자료들을 찾아보고 일화를 읽어보고 할 수야 있다지만
‘누가 무엇을 할 때, 이 사람은 무엇을 했다.’
’누구는 누구를, 누구를 통해 만난 경험이 있다.’
’누구는 아마 ~ 를 통해 누구의 저서를 읽었고 영향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식으로 연결되는 지점들에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 따로 주요 인물들의 연대기표를 그려서 대조하는 작업을 했을거라 확신한다.
초반부터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었다면 좋았을걸.
서양 인물들의 이름 방식 (미들네임으로 부른다거나, 결혼 후 성이 바뀐다거나 하는)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밀리의 서재를 이용하거나 알라딘에서 이북으로 사서 읽는 재미에 푹 빠진지 꽤 지나서 이북이 출시되지 않은 책이 아니라면, 가능하면 종이책을 사지 않고 있다.
독서 모임에 나가서 양장본으로 읽고 계신 분들의 책을 보니 정말 두꺼웠다.
기억이 가물가물 할때나,
동일한 인물을 여러 이름으로 불러서 헷갈릴 때는 종이책을 막 뒤적여보고 싶은 충동도 느꼈지만
사실 전자책 ‘검색’ 기능을 한번 맛보고 나니
종이책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작가인 마리아 포포바라는 사람이 궁금해져서 검색을 하게 됐다.
나이 지긋한 노년의 지식인, 한평생 문예비평가로 살아온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놀랍게도 1984년생이었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잘 정리하면서 살아왔을까 신기하고 놀랐다.

링크는 요기-> https://en.m.wikipedia.org/wiki/Maria_Popova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열심히 ‘한글로’ 구글링을 해봤자 나오는 정보의 양이 너무 적다는 뼈아픈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 영어를 공부해야하는구나.
작가의 웹사이트도 방문해 보았지만 온통 영어라서… 한계를 절감했다.
번역된 책을 읽고 나서 독서 중이나 독서 후에라도
추가로 알아보고 싶은 내용들, 언급된 사진이라도 직접 보고 싶은 것들을 보려면
영어를 공부해서 영어로 구글링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양이 방대하다보니 밑줄 그은 문장들도 엄청 많지만
가장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마거릿 풀러의 삶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책은 엄청난 두께지만 곧 몰입하게 된다.
케플러부터 시작하는데 1장이 가장 쉽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는 파트였다.
진리란 곧 아름다움인 걸까.
책의 곳곳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아름다움을 지적 호기심을 한데 모으는 렌즈로 여기는 관점은 바로 미첼 자신이 우주를 보는 방식이었고, 어쩌면 모든 재능 있는 이들이 우주를 보는 방식일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지 말라.” 에머슨은 일기에서 스스로 훈계했다. “아름다움의 필요성에 감탄하라. 그 밑에 우주가 숨어 있으니.”
살아가면서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진리)에 이끌려 확신을 갖고 끝없이 탐구해나가는, 그런 확신에 찬 인물들이 가득 등장한다.
2021년 한국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 비해 훨씬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확신과 노력에 감탄하게 된다.
마리아 미첼이 배서대학의 학생들에게 한 말이 인상깊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재능을 타고났다면 그만큼 더 노력해야 합니다. 타고난 재능만큼 노력해야 할 의무가 더 늘어나는 셈입니다. … 세상에서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노력을 이어가는지, 얼마나 끊임없이 수고를 들이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지는 시인이란 실은 그 타고난 재능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누구보다 자기 일을 잘해내는 여성은 그것으로써 모든 여성 동지를 돕습니다. 비단 현 시대의 여성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여성들까지 돕게 됩니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그 여성은 인류를 움직이는 것이며 그것은 성장입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번역서 이상의 걸작인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로 대중에게 소개한 에밀리 뒤 샤틀레의 글도 인상 깊다.
내가 왕이라면 이런 과학 실험을 해보고 싶다. 인류의 절반을 잘라내버리는 학대를 개혁하는 실험이다. 모든 여자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무엇보다도 지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것이다.
1974년의 글인데 과연 2021년은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권리를 발휘할 수 있도록
양성에게 동등하게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삶의 만족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더더욱 속도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시대에
보기 드문 가정환경(특히 가장의 자녀교육관)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이 재능을 이렇게라도 발휘했던 것 같다.
얼마나 수많은 별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과학과 시는 공생관계였다.
스펙트럼을 그린다면 정 반대쪽, 양극단에 놓일 것만 같은 과학과 시.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저 문장에 공감하게 된다.
정말 많은 시인과 시, 그리고 과학자들의 상호 영향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시인은 상상력 넘치는 시를 통해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또 과학적 발견을 소재로 시로 표현하는 존재였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내가 가지고 있던 시인과 과학자에 대한 편견, 잘못된 이미지들을 점점 바꾸어 나가야 할 것 같다.
교육과정이 바뀌어 문과 수험생은 과탐을 수능에서 보지 않아도 되었던 첫세대였다.
그땐 하기 싫고 어렵게 느껴지던 과학공부를 피하게 된 것에 기뻤었다.
세월이 흘러 과학적으로 너무 무식한 나 자신이 창피해서 교양을 위해 과학책을 열심히 읽게 됐지만 고등학교에서 배웠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도 남았다.
그 후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문이과로 아이들을 나누어 놓고
더더욱 편견과 고정관념이 고착화된 지난 10년이었던 것 같다.
나부터가 시를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로부터 거의 30년 후 배서대학에서 마리아 미첼에게 교수 자리를 제안했을 때 미첼은 지성의 가치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불편해 봉급을 스스로 절반 가까이 낮춘다.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첼은 배서대학에서 처음 제안한 1500달러의 연봉을 물리치고, 그 대신 자신과 아버지가 머물 방과 식대에 더해 연봉 800달러를 받는 일에 동의한다. 당시 배서대학의 남자 교수들은 일괄적으로 연봉 2000달러를 받고 있었다.
시대적 한계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지나친 겸손, 돈에 대한 무관심을 강요받지는 않았나.
경제교육, 금융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쉬움을 많이 느끼는 요즘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에머슨은 또한 학생 안에 존재적 소망을 “단순히 돈에 대한 욕망으로 퇴보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교사라는 직업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삶을 진실로 환원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의 최우선 가치는 돈이 되어버렸고
직업과 일의 가치는 돈으로만 환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라는 직업의 의미도 변해만 가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까지 말할 것도 없다.
일에는 [재미], [의미], [돈]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그 셋모두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우울감에 빠져있기도 했는데
고민이 많아진다.
풀러의 대화 모임으로 여성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이 열렸고, 마침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품은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책을 매개로 해서 한달에 한번 정도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모임에 푹 빠져 있다.
그리고 온라인(zoom)으로 진행하면 2~3시간까지가 한계인 것에 비해
대면 모임이 주는 ‘진짜 대화’의 매력을 다시 실감한 9월의 독서모임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대부분의 힘을 인간관계에 소진했다.” 풀러는 훗날 자신의 30대 초반을 회고하며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 “목소리는 듣는 이를 찾아낸다”는 개인적 교류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 바로 풀러가 공적 생활에서 달성한 성취를 이루어낸 힘이었다. 이 힘을 통해 풀러는 교류의 장으로 “대화” 모임을 조직했고 성역할과 성역학에 대해 《19세기 여성》으로 질문을 던지며 사실상의 여성주의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에 내재한 사소한 약점, 자아상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때 가장 냉혹해진다. 남을 탓하는 일은 나를 탓하는 일보다 언제나 쉽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를 평가하면서 마거릿은 사실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종의 기원》은 자연선택설을 주장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전복한다. 바로 개체의 소멸을 통해 종이 생존하고 진화하게 된다는 가설이다. 다윈은 죽음이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생득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암시한다. 죽음은 공평한 우주 법칙의 일부이다. 도덕과 형이상학의 구속에서 벗어난 필멸성에는 비난하거나 자비를 구할 여지가 없다. “인생을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에는 위대함이 있다”라는 다윈의 말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읽은 독서모임 멤버가 이 구절을 꼽아주셨다.
메멘토 모리. 필멸성.
코로나 이후 쉽게, 이 순간이 이 사람과 함께 얼굴 맞대는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끝을 생각하고,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지금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된다.
어떤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일이 쉬워질수록 우리는 그 안에 담길 내용을 점점 더 선별하지 않게 된다.
쉽게 전달받은 것들, 빠르게 전달받은 것들에 담긴 내용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단행본 책이 나오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검토하는 수많은 사람들, 정돈된 정도와
영상의 그것들을 비교하면 느껴진다.
물론 영상도 자막을 넣고 편집하고 엄청나게 공을 들여 만들어지는 것들이 있고, 무엇보다 동시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지만
담긴 내용에 대한 고민의 정도를 생각했을 때 난 아직도 책이 선호된다.
요즘 아이들은 검색도 유튜브에서 영상 검색으로 한다던데,
확실히 ‘읽기’ 보다 ‘보기’의 우세한 시대가 왔고
문장을 잘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 리터러시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글도 많이 읽었지만 쉽지가 않다.
내가 기성세대가 된 것일까.
허셜의 재능은 그녀의 “장소의 정신”에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소의 정신은 곧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 자신에게 할당된 시대가 각기 따로 있는 모양이다”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올랜도》에서 썼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된 것은 많은 부분 우리가 있는 장소, 우리가 있는 시대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하지만 용기와 자존의 삶을 살았던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세대의 정신이 머물 장소와 가능성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이 책에서 ‘장소의 정신’이 여러번 언급된다.
위대한 인물들의 삶에 감탄하다가
이 구절을 마주할 때마다 지금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 비교적 최근의 인물인 ‘레이철 카슨’은
함께 읽었던 ‘앞으로 올 사랑’에서도 언급되어 괜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의 형태, 우정의 형태에 대해 어김없이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었다.
스탠리는 이 일로 자신이 결혼 관계의 동등한 자리에서 밀려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듯 보인다. 레이철을 사랑하는 도로시의 마음은 스탠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도로시는 이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확장할 수 있었다. 스탠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마음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한 일을 기뻐했다.
누구의책이었던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얻고자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내면, 자신만의 영역들이 있고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일을 어느 한 사람에게 전부 기대하면 실망감만 얻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배우자 또는 부모)이라 할지라도 내 모든 영역을 그 사람 한명이 충족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과 사회를 생각했을 때 그가 이룬 성취는 말할 것도 없고
한평생 삶을 대하는 신념과 태도에 배울 점이 많았다.
아래 구절은 도대체 책을 왜 읽는지, 어떤 책이 위대한 책인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아 인용해 본다.
졸업 논문으로 쓴 <지성의 낭비>라는 제목의 글에서 레이철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능력, 즉 “사고하고 추론하는 정신”을 낭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논문의 중심에는 레이철의 남은 인생을 지배하게 될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위대한 책에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고귀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며, 진정한 문학은 “어제의 우리보다 조금 더 높이 우리를 끌어올려 주고 세계의 과업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을 하고 싶게 만들고,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책에 대한 깊은 신뢰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었고
힘들었던 8~9월 빠져들었던 책이었다.
책소개 문구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전기, 과학사, 문학사 그리고 러브스토리였다.
좋은 책, 좋은 독서모임 멤버를 만난 것에 감사하며 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