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었다.

작가 박완서.

고등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소설 <그 여자네 집>을 읽고 마음이 아팠던 경험이 박완서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었다.

그때는 학교 시험에 뭐가 출제될까를 고민하느라 소설을 진정으로 즐기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꽤나 흥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 <엄마의 말뚝>을 대상으로 에세이를 쓰며 다시 만났다.

그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님은 다른 교수님들하고는 좀 다르게 학부생 지도에도 열의를 보이셨던 것 같다.
한명한명 에세이를 중간점검 – 첨삭지도 – 최종평가 해주셨기에,
매우 즐겁게 “공부하는 기쁨”을 배운 수업이었다.

꼼꼼하게 소설 텍스트를 읽고, 비평하는 에세이를 쓰면서 읽었던 <엄마의 말뚝>은 꽤나 끔찍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녀 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딸에 대한, 엄마에 대한 다정함이 느껴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더 시간이 흘러서 내가 문학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서,
예전에 내가 <그 여자네 집>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했던 것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고
‘수능에 출제 될까’, ‘어떻게 출제될까’를 생각하며 다시 만나고 있다.

친구와 둘이 하는 독서모임에서
3월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문인 에세이를 읽자고, 친구가 추천한 책이 바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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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에세이’ 좀 그만 읽어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읽다 보니 결국 작가의 매력을, 작가의 인간미를 가장 잘드러내는 건 결국 에세이 인것 같다.

다정한 할머니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들려주는 듯한 느낌의 이야기들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정신없고 지쳐가는 현실에서 조금씩 아껴가며 읽어서 그랬는지,
마치 달콤한 간식을 숨겨놓고 먹는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굳이 작가가 살아온 현대사를 언급하지 않아도, 개인사적인 아픔까지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겪을 수 있을 최대의 고통을 겪어낸 분이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초월한’ 느낌마저 든다.

좋아서 밑줄 친 구절들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몇 옮겨 본다.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다.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상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일 수밖에 없겠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옛날 분이셔서 그런가 순박하게만 세상을 보는거 아닐까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지만 믿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진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들 모두모두 행복하라는 말씀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세상사를 보는 시각, 인생사의 태도를 배우고 싶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벌써 끝이야’ 하는 생각이 들만큼 두껍지 않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따뜻한 시선, 다정한 시선의 에세이로 기억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작품을 더 찾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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