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작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이 나왔고 베스트셀러에 있었기에 흥미가 생겼었다.

책 두께를 보아하니 혼자서는 절대 완독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새학년이 되어 바빠지기 전에 겨울 끝자락에 읽고 싶은 마음에
호기롭게 2월의 독서모임 책으로 추천하여 읽게 됐다.

멤버들을 고생시키며 겨우겨우 완독한 지금은
다시는 독서모임 책을 함부로 추천하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하고 있다.
반드시 어느정도 내가 읽어본 후에 추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완전 별로여서가 아니라 모두를 힘들게했다는 마음에 계속 따끔따금하다.

책검색 결과.

책을 읽는 동안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에 저자가 출연(온라인연결)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반 정도 읽었을 때 1편을 시청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본 것은 아니라서 포맷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능과 교양의 중간지점을 찾느라 다소 어처구니 없는 질문과 컨셉으로 헛웃음을 짓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자는 (미리 예상질문을 뽑고 기획된 것이겠지만) 책의 내용을 알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어서 좋았다.
책을 읽지 말고 그냥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면 액기스만 싹 뽑아서 정리해줄텐데 왜 힘겹게 읽느라 애썼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책에 소개된 사례, 핵심들을 잘 보여주었다.

그래도!
내 스스로 끙끙대며 읽어서 생각하고 깨달은 것과
영상을 통해 쉽게 이해하는건 분명히 남는게 다르겠지 하는 ‘독서’에 대한 믿음으로,
무엇보다 내가 추천해놓고 완독을 못하고 독서모임에 참석하면 너무나 민망하기에
겨우겨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서두에 추천의 글들이 있는데 책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마음의 대비를 하게 해준다.

능력주의가 과도해지면서 능력과 도덕 판단력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 추천의 글 중 ‘문용린 교수’

알게모르게 능력과 도덕이 비례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인식과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제 그 폐단이 심각해졌기에 화두를 던진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게 해줬다.

오늘날 학생들은 너도 나도 소수의 주요 대학들만 선호한다. 부모의 행동방식 역시 달라졌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소득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인생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그런 두려움을 피하고자 부모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적극적으로 자녀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들의 시간 사용을 간섭하고, 학점을 관리하며, 활동을 지시하는 등 희망 대학의 입맛에 맞도록 자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작년에 근무하는 지역을 옮기고 내가 느낀 것들과 그 이유에 대해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고 이해하게 됐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통제 불가능한 요인’이 생각보다 많다.
줄 중에 줄이라는 ‘탯줄’과 개인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시대’까지.
공정한 기회를 줬고, 공정한 시험을 통과했으니 공정하게 보상해야지 하는 생각은
좁은 시야를 가지고 편안하게 누려왔던 생각인 것을 깨닫게 한다.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공동선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아니 최근들어 더더욱 기술관료적 시각에서 인간의 가치를 생각해 온 것 같다.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정치인들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 공허한 말을 지겹도록 반복할 때는, 그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심증이 가게 마련이다. 바로 사회적 상승 담론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불평등이 위험수위까지 올라왔을 때 이러한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불평등이 날로 심화돼가는 사회, 그로인해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국가에 사는 기성세대로서 생각이 많아진다.

프랭크는 이 모든 교육 운운하는 이야기가 불평등을 직접 초래한 정책에서 민주당의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생산성은 1980~1990년대에 증가했으나 임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연 교육 실패가 불평등의 주원인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국가에서 대놓고 학생을 ‘인적자원’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고,
교육이 모든 사회문제의 만병통치약인듯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하려면 학교에서 무엇을 더 가르쳐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매우 공감하는 구절이었다.

이는 전문가들이 대답해야 할 과학적 질문들이 아니다.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들이다. 바로 민주시민을 위한, 민주시민이 할 수 있는 질문들인 것이다.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툭하면 이문제는 과학의 영역이라고,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돈을 잘 버는 일은 그 사람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그가 한 기여의 가치와도 무관하다. 성공한 사람이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가 뒤죽박죽된 욕구와 욕망(중대하든 하잘것없든 어느 시점에 소비자의 수요를 구성하는 요소들) 속에서 관리(천재성과 교활함, 시의성과 재능, 행운과 오기, 고집 등의 종잡을 수 없는 혼합)를 잘 해냈다는 것밖에 없다. 소비자 수요의 충족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게 아니다. 그 가치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의 도덕적 지위에 따라 정해진다.

다소 파격적이다. 그저 ‘관리’를 잘해냈다는 것.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사회에서 화제가 될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1981년의 회칙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일을 공동체와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일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이 국가 전체와 이어지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동포와 함께 공동선을 계발하도록 해준다.”

일의 가치가 자본이나 투자의 가치에 비해서 경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이란 무엇일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이 돌아오게 된다.

나는 제안한다. 급여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투기 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토론의 주제로 삼을 것을. 당연히 다른 입장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넓게 보아 일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그러려면 우리 경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술관료적 정치가 숨겨 왔던 질문들 말이다.

결말 챕터가 시작하기 바로 전, 저자는 파격적 제안을 한다.
앞서 워럿버핏과 그 비서의 사례 (비서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에서도 생각했던 문제지만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에 해당하는 지를 엄격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긴 하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말부분이다.
개인의 ‘겸손’에만 기댄다면 분명 한계가 있다.

능력주의 시스템은 (앞서 길~~~게 얘기한 대로) 승자에게든, 패자에게든
연대와, 겸손을 이끌어내기가 정말 어려운 시스템이라는 것에 공감한다.
겸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책의 분량 중 결론이나 대안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소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공동선을 생각하게 하며
특히 능력주의에 젖어있는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의도가 잘 전달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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